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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내용]
ㅇㄴ
[답변내용]
중국은 아직도 통일된 상태가 아닙니다. 중국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타이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따진다면 중국도 분리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둘의 차이가 워낙 크고 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타이완보다는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보고 있죠 현세에 이르러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다음은 중국의 역사와 정치체계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역사 1. 선사시대 1927년 중국의 베이징시 외곽 저우커우톈[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고인골(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상동인(上洞人)이 저우커우톈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최고(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文樣)을 그린 토기로 화베이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앙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흑색토기(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둥성 룽산전[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2. 고대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夏)·은(殷)·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은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은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豪族)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黃巾)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3. 중세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등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이 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세는 581년 남조의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科擧)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하였다. 4. 근대 당나라 말에서 5대에 걸친 비약적 산업발전 상황에서 송(宋)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송나라의 국책 기조는 재정(財政)에 두었으며 국내 경제를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완성하였다.당말(唐末) 5대에 걸치는 혼란 속에 귀족계급은 몰락하고 균전제(均田制) 아래에서 발전해온 형세호(形勢戶)라는 신흥 지주층 세력이 신장하였다. 송(宋)나라가 절도사를 폐지하자 그들이 장원(莊園)의 영주가 되고 경작은 전호(佃戶)라는 농노가 주로 하였다. 송대의 문화적 특색은 국수적(國粹的)·내성적·서민적인 점에 있고, 그 기반은 지주·관료들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으로는 넓은 지역에 요(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다(916∼1125). 또 서부에서는 티베트계[西藏系]의 서하(西夏)나라가 일어나 송(宋)나라는 두 나라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12세기에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요(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함락시켜, 송(宋)나라는 강남(江南)으로 도망하여 항저우[杭州]에 임시 수도로 정하였으므로 이를 남송(南宋)이라 칭한다(1127). 13세기 초에는 몽골 민족에 의해 원(元)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원정하는 등 여러 지역을 경략하였다. 그러나 원왕조(1216∼1368)는 인구와 문화수준의 열세 때문에 명태조(明太祖)에 쫓겨 북방으로 추방되었다. 명나라는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專制國家)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국내재정의 곤란과 환관(宦官)의 발호, 기강의 퇴폐 등 문제가 산적한 명왕조가 내란으로 자멸하자, 만주 여진족의 청(淸)이 북경에 들어와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5. 현대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侵占)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割讓)하고, 안남(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 공업이 일기 시작했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했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약 20년 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 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했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 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 성(省)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등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41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1999년 현재 국가 주석은 장쩌민[江澤民]이고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주룽지[朱鎔基]이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홍(紅)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전(專)이라고도 한다. 시기상으로는 전자를 변혁기, 후자를 공고기라고 한다. 건국 후 초창기인 1949~1953년은 변혁기에 해당하고 중국혁명은 두 개의 세력에 의해 성공했다. 하나는 해방구로 공산통치 지역인 홍구(紅區)에서의 마오쩌둥 세력과 국민당 치하의 백구(白區)에서 지하운동을 펼쳐온 류샤오치[劉少奇] 세력이었다. 1949년 새 정권이 수립되자 홍구와 백구의 지도자들은 혁명완수와 국가건설을 위해 대동단결했으며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주의 독재론에 근거하여 노동자·농민·소자본가에서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계급의존적인 지주·자본가·반동세력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면서 적대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토지개혁과 농업합작사 건설을 단행하고 자본주의 기업을 국유화했다. 1953~55년은 중국에서 국가기구가 정비되고 제도화되면서 류샤오치가 정책을 주도하는 공고기였다.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되었으며 헌법이 채택되고 법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제1차 경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연평균 7%의 공업성장률을 보였으며 능률이 중시되고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이 강화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하의 국무원의 역할이 팽창했다. 이 결과 공업은 발전되었으나 농업은 낙후했고 따라서 도시와 농촌 간에,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간에 소득 격차가 벌어졌다. 또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질서 있고 능률적인 경영은 이루었다 해도 마오쩌둥이 항상 강조해온 군중노선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 계속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1955~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는 실패했다. 농업생산력은 하락했으며 이에 더해 급속한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마오쩌둥의 정책 실패는 새로운 공고기를 도래하게 했다. 이 공고기는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등 4인방도 합세했다. 이 새로운 변혁기가 1969년까지 지속된 문화혁명이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렸으며 이 과정에서 화병으로 사망했다. 문화혁명이 휩쓸고 간 후 중국은 1976년까지 새로운 공고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공고기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공고기에 들어서고 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특색적(中國特色的) 사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고 있다. 개혁의 개방과 속도, 그리고 범위를 놓고 공산당 지도부와 학생·지식인 간의 의견차이는 19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사태로 귀결되었다.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