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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내용]
LG가 부산 연지동인가에서 어떤 공장으로 시작했다고 하던거 같던데
대기업들의 사업시작점이 어딘지 궁금합니다.
[답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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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견인 정주영 회장현대그룹은 창업 반세기라는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국 경제사의 한 장을 기록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현대그룹의 창업주는 84세라는 고령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몇 안되는 창업 1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불도저같은 추진력과 황소같은 뚝심으로 오늘날 현대를 한국 최고의 재벌그룹으로 일구었다.정 명예회장은 1950년 1월에 현대그룹의 모체인 현대건설을 창업하면서 파란만장한 사업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수난기에 건설업에 뛰어든 정 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부지런함으로 폐허가 된 국토 복구공사에 참여하면서 건설업체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현대는 이후 60년대 근대화 물결에 발맞춰 조국 근대화 사업에 앞장섰다. 65년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시작으로 해외진출에 성공한 현대는 월남 캄란 만 준설공사, 알래스카 협곡 교량공사 등 해외공사 수주에 성공하면서 중동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7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는 중동의 건설 붐을 타면서 세계적인 건설회사로 발돋움하게 됐다. 76년 7월에 착공한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공사는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9억3천만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공사로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기록되면서 현대를 일약 세계적인 토목건설업체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공사 이후 현대는 79년까지 51억6천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등 한국 기업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건설사업이 어느정도 성장괘도에 올라서자 정 회장은 74년 1억달러를 투입해 연간 5만6천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의 공장건설에 착수, 1년반만에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 1호인 ‘포니자동차’를 탄생시켰다.80년대에 들어서는 동남아 건설시장 진출과 동시에 세계 각 지역을 대상으로 수출에 주력했던 현대는 이후 90년대에 접어들자 정회장의 숙원사업인 북방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정 명예회장이 금강산 개발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89년으로 알려졌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추진해 남북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정 회장의 의지는 이후 9년이 지난지난해 11월 역사적인 현대금강호가 금강산으로 출항하면서 관철되게 됐다.재계 큰별, 고 이병철 회장현대와 함께 양대산맥을 형성하며 성장해온 삼성그룹은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파워 엘리트 집단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삼성그룹의 창업주는 지난 87년에 타계한 고 이병철 회장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지방 토호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순탄한 성장기를 보내면서 26세때인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차리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중일전쟁이 터지자 사업을 일시 중단했던 이 회장은 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어 사업수완을 보이기 시작, 이후 부산에서 무역업체인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53년에는 생산업체인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사업가로 변신하게 됐다.제당업과 모직업을 수입 대체산업으로 판단한 이 회장은 모직공장 건설에 착수, 56년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제일모직 제품은 공장에서 출하 되는대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제당과 모직에서 대성공, 상당한 돈을 벌게된 이 회장은 시중은행, 비료업체, 타이어 등의 대주주 자리를 구축하며 한국 재벌의 상징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이후 이 회장은 전자 엔지니어링 무역 금융 등에 진출, 세계 일류 그룹으로 삼성을 성장시켰다. 오늘날 삼성이 한국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대한 조직과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 회장의 창업 이념과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이 회장은 삼성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부단한 학습을 강조해 왔고, ‘부정 없는 깨끗한 조직’으로 삼성을 가꾸어 왔다. 이 회장의 이러한 경영철학을 밑바탕으로 오늘날에도 삼성그룹은 한국 재계의 최고 파워 엘리트 집단이란 명성을 받고 있는 것이다.재계 신화 탄생 김우중 회장창업 30여년이란 짧은 역사로 한국 재계 2-3위 자리를 구축하고 있는 대우그룹의 창업과 성장사는 한편의 드라마로 그 주인공인 김우중 회장은 한국 재벌사에서 신화적인 기업인으로 통하고 있다.“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계경영을 표방해 온 김 회장은 연 평균 해외 체류기간이 1백45일로 집계될 정도로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김 회장은 67년 3월 자본금 5백만원으로 대우를 창업, 사업에 투신했다. 김 회장은 초창기부터 내수시장 보다는 해외수출에 역점을 두는 경영마인드를 구축했다.68년부터 72년까지 부산 제1공장~제3공장 및 경기도 소사 가발공장 등 생산시설 기반을 다진 김 회장은 이후 73년부터 본격적인 경영 다각화에 착수, 제품 고급화와 함께 수출신장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기계 인수를 비롯, 대우개발·대우건설을 설립했고, 그 이듬해 대우전자를 설립하는 등 사세를 확충해 나갔다.75년 사옥을 현재 서울역 대우센터로 옮긴 김 회장은 76년 중장비 철도 조선 등을 주축으로 한 중공업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자동차 건설분야에도 박차를 가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했다.이처럼 대우가 30여년이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를 리드하는 재벌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창조·도전·희생의 3대 정신으로 무장한 김 회장 특유의 열정과 집념, 여기에 세계시장 개척을 위해 1년 3백65일을 쉬지않고 발로 뛴 대우맨들의 혼신의 노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김우중 회장의 철학에서 그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객만족 경영 구인회 회장LG그룹은 사돈간인 구씨와 허씨 양집안이 일궈온 그룹이다. 이들 양집안은 경상도의 부촌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친-인척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다 구인회씨가 14세때 허을수씨와 혼인을 치르면서 양가는 사돈지간이 됐다.LG그룹의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은 처가쪽의 허남석씨와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업경험을 쌓은 후 1931년 당시 2천원의 자금을 가지고 경남 진주로 진출, ‘구인회 상점’이라는 포목상을 차렸다. 포목상으로 많은 돈을 벌게된 구 회장은 고향 부근에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40년에는 상호를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바꾸고 주식을 발행하는 등 근대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해방이후 부산으로 본격 진출한 구 회장은 무역업과 판매업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했고, 47년 1월 LG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락희공업사’는 51년 미국에서 사출성형기를 들여와 플라스틱 제품을 대량 생산하면서 한국에 본격적인 플라스틱 시대를 열게됐다.구 회장은 이어 53년 무역업체인 ‘락희산업’을 설립한데 이어 이듬해엔 국내 최초로 연고 치약을 생산, 독점 판매하기 시작한 이후 세탁-화장-가루비누 등을 잇따라 생산했고, 67년에는 국내 최초로 샴푸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치약과 세제, 그리고 화장품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한 구회장은 58년 자매사인 금성사를 설립하면서 사업 황금기에 접어들게 됐다.금성사는 59년 국내 최초로 진공관식 라디오 개발에 성공한 것을 비롯, 60년 선풍기, 61년 자동전화기를 국내 최초로 생산한데 이어 세탁기 냉장고 흑백 TV를 잇따라 생산해 내면서 우리국민들에게 전자공업의 대명사로 금성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는 광고 문구를 지금도 기억하는 대중들이 많을 정도로 금성의 성장은 눈부셨다.이처럼 LG그룹의 확고한 기반을 다진 구인회 회장이 69년 12월 타계하자 2대 그룹회장에 오른 구자경 회장대에 들어서 LG는 재도약,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동생에게 대권 넘긴 최종건 회장2세 경영승계가 관례처럼 되어 있는 한국 재벌사에서 보기 드물게 동생에게 경영권을 넘겨줬던 SK그룹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의 경영권 승계사례는 지금도 재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재계에서는 오늘날의 SK가 있기까지는 고 최종건-종현 형제의 돈독한 형제애를 바탕으로한 끊임없는 노력과 강한 개척정신, 여기에 이들 형제의 탁월한 경영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SK의 창업주를 엄밀히 따지자면 고 최종건 회장이다. 살아 생전에 억척스럽고 열정적인 사업가로서 그룹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화제를 뿌리기도 했던 최종건 회장은 45년 일본인 회사인 선경직물에 입사했던게 인연이 되어 오늘날의 SK그룹으로 이어지게 됐다.해방후 선경직물이 주인없는 회사로 되자 피선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최 회장은 이후 사업수완과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53년 10월 선경직물의 경영자에 오르게 됐다.최 회장은 회사의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으면서 사세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56년 이후 판매시장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선경직물은 국내 섬유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되기 시작했다. 66년 자매사인 해외섬유를 설립한데 이어 69년에는 선경그룹의 핵심사업체인 선경합섬을 설립했다.꾸준한 성장세가 지속되자 최 회장은 70년에 선신섬유를 설립했고, 73년에는 관광호텔인 워커힐을 인수, 쉐라톤 워커힐로 개명, 운영하면서 사업을 확충해 나갔다.그러나 일취월장 성장가도를 달려왔던 최 회장은 자신의 사업능력과 열정을 다 펼쳐보지 못하고 73년 11월 지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최 회장이 타계하자 고인의 유언대로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이 2대 회장으로 경영권을 넘겨 받으면서 SK그룹은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최종현 회장은 회장 취임후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면서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석유화학시대의 막을 올리게 됐다. 내용출처: http://www.ilyosisa.co.kr/ILYO/174/business/26-1.html
[출처: 네이버 지식검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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