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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내용]
상황적합이론에 대한 정의와 예를 좀 들어주세요
[답변내용]
상황적합이론
요약
리더십 과정에 작용하는 상황적 요소에 따라 그 성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피들러(F.E. Fielder)의 이론.
본문
리더십의 결정요인이 리더의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더가 처해있는 조직적 상황에 있다는 주장이다. 초기의 리더십 이론은 리더십을 단지 지도하는 개념으로 보고 지도자에게 편중되어 있었으나, 사회변화 등 시대적인 조류에 따라 구성원과의 협력이란 차원에서 리더십이 조정되고 발전하였다. 이 이론은 각기 다른 상황은 리더십에 있어서 다른 접근방식이 요구된다는 전제 아래 어떤 상황이든리 가장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리더의 지위권력, 수행해야 할 과제의 구조와 본질, 리더와 구성원 간의 인간관계 등을 필수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정한 조직적 상황에 있어서 어떠한 지도행동이 적절한가를 규명하여 그것에 알맞는 지도자가 결정되는 것이며, 조직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리더십의 유효성도 다르게 나타나므로 리더십 상황이 리더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경우에는 과업지향적 리더가 효과적이고, 상황이 리더에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으면 관계지향적 리더가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나 가장 효과적인 리더십 유형은 없으며 리더십 효과는 상황에 적합한 리더십 유형을 발휘할 때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삼국지 책을 읽어 보시면 좋을듯 하네요.
역대 한국 대통령의 리더쉽에 관한 논문과 책은 많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구요.아래는 참고 하시라고..한국의 ceo 전 현대그룹의 명예회장 정주영임니다.
후대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많은 일들을 하셨죠.
끊임없는 혁신, 기업가 정신의 귀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맨몸으로 국내 최대 기업을 일군 만큼 「불도저 같은 저력으로 신화를 창조한 마술사」로 불렸다.
그는 평소 『나는 현대를 통해서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의 신화가 탄생하곤 했다.
신화의 시작 아도서비스새로운 사업을 궁리하던 정회장은 1940년 동업자 두 사람과 함께 사채를 얻어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공장은 잔금을 치른 지 닷새만에 그의 실수로 불이나 잿더미가 돼버렸다.
겨우 목숨만 구한 정회장은 공장뿐만 아니라 고객이 맡겨놓은 자동차까지 태워버려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고비마다 특유의 계산과
불도저 경영으로 위기 극복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그는 또 사채를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재개했다. 신설동 빈터에 무허가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남들보다 빨리 고치고 수리비를 비싸게 받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악몽의 고령교 공사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가 6·25 전쟁통에 파손되자 정부는 1953년 이를 복구하기로 했고 전쟁 전에 현대건설을 세웠던 정회장은 이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공사는 그에게 골칫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계절에 따라 다른 낙동강 수심과 열악한 장비시설, 예기치 않은 홍수 등이 공사를 방해했다.
가족과 동료들은 공사를 중단하자고 했으나 정회장은 사업에는 신용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형제들의 집을 팔고 얻을 수 있는 빚은 모두 얻어 1955년 결국 계약한 기한보다 2개월 늦게 공사를 완공했다. 계약금액이 5,478만 환이었고 적자는 6,500만 환이었다.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크게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정부공사를 대부분 수주하는 계기가 됐다.
기업성공에 있어 신용과
진실이 곧 자본
살 길은 해외, 태국진출
국내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세무조사 등의 곤욕을 치른 정회장은 해외에서 활로를 찾았다. 그 첫 성과가 1965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 낸 것이다. 선진 16개국 29개 업체와 겨뤄 따낸 이 공사는 국내외 공사 전체 계약액의 60%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런데, 역시 시련이 닥쳤다. 태국의 엄청난 비와 나쁜 토질, 기술의 낙후성 등 때문에 공사는 진척이 안됐고 현대건설은 또 다시 큰 손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공사에서 돈은 잃었지만 얻은 고속도로 공사의 경험이 나중에 경부고속도로를 수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베트남 캄란만 준설공사 등을 거치면서 현대건설은 해외진출을 확장했고 나중에 중동특수를 일궈낼 바탕이 됐다.
중동신화의 서막 주베일 항만공사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주베일 항만공사는 공사금액만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에 맞먹는 9억 3,0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4,600억원)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렀던 일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9억 3,114만 달러로 낙찰 받았다.
공사를 진행해 가던 정회장은 또 하나 아이디어를 구상해냈다.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 선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오일쇼크로 침체돼있던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주고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놓은 극약처방이었다. 그리고 19번에 걸쳐 이 거대한 바지선 운반작업은 시행됐다.
이처럼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현대건설은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등 중동일대 대형 공사를 잇따라 수주하게 됐다. 1975년 중동 진출 뒤 1979년까지 현대는 약 51억 6,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정주영과 정치`
『CY라 불러다오』
정회장의 개인사에서 DJ, YS와 어깨를 겨루던 92년과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 다음해만큼 굴곡이 심했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이 기간 그는 국민당 대표로 출발해 국회의원, 대통령후보를 거쳐 형사 피고인으로 변했다.
그의 이니셜 CY는 정치에 입문한 92년 1월1일부터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12월18일까지 그가 항상 불러주길 바랐던 명칭이다.
정회장은 77세 고령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통령후보였지만, 그 해 3월 총선에서 창당 45일 만에 31석을 획득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등 세인들에게 일대 파란을 몰고 온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92년 대선 고배이후
시련의 세월로
대통령 후보로 나선 직접적인 배경은 92년 언론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현대그룹 세무조사에 대한 가시지 않은 「앙금」때문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약진을 거듭했다. 92년 1월 8일 그는 『6공에 매년 두 번씩 거액의 정치헌금을 냈다』고 발표하며 세인의 이목을 끈 뒤 그 다음달 8일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5월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그는 『집권하면 1년 뒤 재벌을 해체하겠다. 공산당 결성을 막을 필요가 없다.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는 등 깜짝 놀랄 만한 공약을 내세우며 저돌적인 대권 야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3위 낙선. 이때부터 정회장의 기세는 급격히 꺾였다.
93년 1월 15일 출국이 금지된 그는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대선법 위반 혐의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혐의 등으로 소환 조사를 받은 뒤 그 다음달 9일 의원직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어 그는 국민당을 탈당한 뒤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그는 98년 자서전에서 『5년 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YS의 실패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내가 뽑히지 못했을 뿐, 후회는 없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를 의식한 듯 『혹자는 대통령 출마에서의 낙선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고 주장하던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92년 출마 당시 2,000억원을 국민당에 기부해 정치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끝내 물거품이 됐으며 그가 당원 단합대회 때 즐겨 불렀던 「가는 세월」처럼 그도 흘러가는 시간을 막지 못했다.
■`정주영과 재계
정회장은 현대라는 기업을 넘어 우리나라 재계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통상 기업인들의 집단, 그 중에서도 대기업 중심의 특정한 세력으로 각인된 재계라는 실체가 우리 사회에 제자리를 잡는데 기여한 그의 역할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특히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가 재계의 위상 강화를 위해 남긴 족적은 한마디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정회장은 77년에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된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그 동안 부지만 잡아놓은 채 건물을 짓지 못하고 있던 전경련회관의 착공에 들어가 현재 재계의 본산으로 일컬어지는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79년 완공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재계를
결집시키고 힘을 외부로 표출
이후 정회장은 87년 전경련 회장직에서 자의로 물러날 때까지 11년 간 특유의 뚝심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재계 지도자들의 힘을 결집시키며 전경련과 재계의 위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정부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못하던 재계가 경제적으로 특정한 이슈에 대한 건의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설파하고 사회·정치적으로도 재계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가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인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전경련 회장으로 있는 동안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및 지나친 규제의 철폐, 저금리 정책 촉구 등 민간주도 경제를 위한 정책 개선을 역설했고 이를 통해 재계의 위상도 높였다.
5공화국 당시 정권은 그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권력이 전경련 회장을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퇴임 압력을 물리친 일은 자서전에서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이 일을 포함해 전경련 활동을 통해 재계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한 부분에 대해 스스로 상당히 자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리나라 민간경제를 주도하는 전경련 회장으로서 나름대로 민간 경제인들의 발언권을 더욱 강화시켜 한국 경제의 기틀을 다지는데 얼마 만큼은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선임 전경련 회장 및 동시대의 다른 대기업 총수들과 다른 점도 바로 이런 대목에 있다.
대부분의 총수들이 정부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조용조용한 가운데 실리를 얻으며 내실을 다졌던 반면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재계를 결집시키고 여기에서 모아진 힘을 외부로 표출해 세력화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점에서 그는 고(故) 이병철 회장이나 구자경 회장과 심심치 않게 대비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그는 전경련 활동 뿐 아니라 현대가 앞장선 남북경협을 통해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재계의 또 다른 힘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정회장이라고 해서 재계에 긍정적인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대권을 노렸던 그의 정치 참여는 「돈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서 쌓아온 그의 명성과 재계의 위상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가 기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정권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정치 참여는 한 차례의 외도치고는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정주영과 건설
정회장은 현대건설을 토대로 현대를 키워냈다. 정회장과 현대건설은 6.25 이후 붕괴된 국토를 재건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건설업계의 맏형 역할을 하며 시장을 개척했고 업계를 사실상 주도했다.
특히 그의 노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건설 업계가 세계 10위권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자연에 맞서는 건설업은
정회장 기질에 적격
소양강 댐을 비롯해 한강인도교, 경부고속도로 등 현대건설이 해낸 공사는 건설업계의 대표적 공사가 됐고 현대건설은 건설업계의 사관학교로, 그 기술은 업계의 시방서로 통했다.
정회장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이듬해인 지난 48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했다.
이후 2000년 5월 현대건설 이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54년을 현대건설과 함께 했고 현대건설은 현대의 주력 기업으로 단양시멘트(현대시멘트), 현대조선, 현대중공업 등 현대 계열사의 모태가 됐다.
단양 시멘트는 건설 공사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시멘트 공급 기업으로, 현대조선은 20세기 대역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港) 공사의 철 자재 공급원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회장은 관청과 미군을 드나들며 자동차수리비를 수금하던 중 건설업자들이 당시로는 거액인 1천만원씩을 단번에 받아가는데 정신이 번쩍 들어 『기왕이면 큰돈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에서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고 술회했다.
세계 최초의 정주영 공법으로 서해안을 간척지로 개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좁은 농토에 애착이 많았던 정회장은 80년대 초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착수했다. 한국의 서쪽 해안의 지도를 바꾸는 대역사였다. 엄청난 규모의 바다를 막아 농토로 전환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 중 최종 물막이 공사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1984년 그는 노후화된 대형 유조선을 이용해 엄청난 압력의 물의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여의도의 48배에 해당되는 서해안을 간척했다. 이것은 후에 서산농장이 된다.
■`정주영과 스포츠
정회장은 체육계에도 깊고 넓은 발자취를 남긴 스포츠의 거목이었다. 생전 그의 명함에는 서울올림픽유치준비위원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고문, 체육동우회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집행위원 등 수많은 체육관련 직책이 들어 있었다. 고인은 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한국인 가운데 하나였다.
정회장이 한국 체육에 기여한 가장 결정적인 공로는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기를 마련한 서울올림픽 유치였다.
64년 도쿄올림픽 때 관중석에서 일본인들이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류 최대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을 보고 『우리도 올림픽을 해야되겠다』고 결심했다는 정회장은 81년 올림픽유치단의 일원으로 독일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IOC가 서울을 제24회올림픽 개최지로 확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뚝심과 집념의 기업인으로 목표를 정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정회장의 추진력이 서울올림픽 유치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올림픽 유치시 IOC위원에
매일 생화배달로 감동 이끌어내
IOC 총회를 앞두고 독일 현지로 날아간 정회장은 독일에 주재하고 있는 현대그룹 임직원을 총동원, IOC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뛰었다.
IOC 위원들이 묵던 호텔 방에는 「현대맨」들이 고르고 고른 싱싱한 생화가 아침마다 배달됐고 정회장의 해외 기업인 인맥들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도 정회장은 여전히 일선에서 성공적인 운영에 헌신적이었다. 82년 대한체육회장과 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 정회장은 대회비는 물론 한국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경기용 차량을 모두 현대자동차가 무상 제공하도록 했고 현대그룹의 인력과 재원을 통해 국제스포츠계 거물급 인사들에게 한국에 대한 호감을 심어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
올림픽을 마친 뒤에도 정회장의 체육계에 대한 기여는 끝나지 않았다.
축구와 야구, 농구, 핸드볼, 양궁 등 한국체육의 간판 종목 가운데 정회장의 후원을 받지 않은 종목이 드물며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4대 종목인 축구, 야구, 농구,배구에서 현대가 언제나 정상권을 맴도는 전력을 유지한 것 역시 정회장의 관심과 배려 때문이었다.
특히 정회장은 역사적인 남북교류의 물꼬를 남북한 농구대표팀 교환경기를 통해 이끌어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젊은 시절 씨름선수이기도 했던 정회장은 아들들에게도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대물려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은 축구협회장을 맡아 2002년월드컵축구대회 유치와 개최를 맡고 있고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고문은 야구협회를 맡아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따내는 등 한국 체육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주영과 남북관계
정회장은 남북화해의 물꼬를 텄다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반세기 동안 상호 적대적이었던 남북관계를 완화하는 데 적지않은 공을 세웠다.
특히 정회장의 집요한 노력으로 지난 98년 11월 18일 첫 출항한 금강산 유람선은 남북간 오랜 대립과 불신을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향한 이정표로 기록됐다. 당시 방한 중이던 빌 클린턴 전 미대통령은 금강산 유람선의 출항 장면을 TV로지켜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며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한미공조 의지를 다졌다는 후문이다.
정회장의 대북 사업 의지는 89년 1월 그의 첫 방북으로 가시화됐다. 당시 그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현재 금강산 관광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대결적 남북관계로 빛을 보지 못하던 현대의 금강산 사업은 현정부의 대북포용정책과 만나 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 「소 떼 방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두 번째(10월)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을 담판 지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측 지역으로 넘어간 정회장의 방북행에 대해서는 「역시 현대 왕회장」이라는 찬사를 낳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으로 물꼬가 트인 현대의 대북사업은 남북영농사업, 평양체육관 건립, 남북농구경기대회, 서해안 공단개발 사업 등으로 이어졌다.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이 같은 현대의 대북 사업은 단순히 일개 대기업의 사업을 떠나 남한 정부의 강력한 화해 의지를 보여준 결과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금강산
관광사업,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
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의혹으로 악화되던 국내외 여론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선이 첫 출항을 했고 99년 6월에는 서해교전에 이은 민영미씨 억류사건으로 관광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관광객 신변보장협상」이 타결되면서 관광이 재개됐다.
이에 따라 현대의 금강산 사업을 통해 보여준 남한 정부의 포용의지는 정상회담과 이로부터 이어지는 남북 화해와 협력분위기를 이끈 견인차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남북 화해의 일등공신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대북 사업에 대해서는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소 한 마리로 야반도주한 정회장의 수구초심이 만든 노욕이라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회장의 경영일선 퇴진과 뒤를 이어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에 유동성 위기가 닥쳐오고 대북 사업 전담사인 현대아산의 모회사 현대건설이 자금난에 빠져 금강산 관광대가도 제때 북측에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자 이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정부도 그동안 「햇볕정책의 옥동자」라는 찬사를 보내던데서 국내 대기업 구조조정과 「대북 퍼주기」라는 비판여론을 의식해 정부와는 무관하며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북측과 현대가 해결할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이 같은 부정적 상황과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회 장이 남북경제협력과 남북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은 대북사업의 발전적
방향모색이 필요한 때
임가 공이나 단순 교역에 머물던 남북경협이 투자를 중심으로 한 남북 간의 본격적인 협력사업으로 성숙했고, 금강산 관광을 통해 국민들의 대결적 대북 감정을 다독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 북측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남측을 신뢰하고 국가재건의 파트너로 남측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회장은 말년에 금강산 관광을 시발로 개성공단 건설 등 북한 프로젝트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끝내 결실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의 노력을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상생하기 위해 대북 사업의 발전적인 방향 모색을 해야 할 것이다.
■자료정리:석호징 연구원
(고려대학교 기업경영연구원) 내용출처: http://100.naver.com/search.naver?adflag=1&cid=AD1033036743044&query=&where=100&command=show&mode=m&
[출처: 네이버 지식검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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